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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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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불교는 삼국 시대에 전래된 이후 한국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 불교는 통불교적 성격, 자심(自心) 중시, 호국불교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시대를 거치며 발전했고, 특히 신라 시대에는 원효, 의상 등 고승들의 활약으로 불교 사상이 융성했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숭상되었으나, 조선 시대에 억압을 받았다. 근현대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여러 종단이 활동하고 있다. 현대 한국 불교는 기독교와의 관계, 사회적 역할 확대, 미래 세대와의 소통 등 다양한 과제를 안고 있다.

2. 한국 불교의 특성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한국 불교는 한반도의 문화와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며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켜 왔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41]

첫째, 인도나 중국에서 분화된 다양한 불교 사상들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려는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는 원효의 화쟁사상,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정혜쌍수 등에서 나타나듯, 교종선종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함께 중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둘째, 복잡한 교리 체계를 핵심적으로 파악하고 수행을 통해 자신의 본성(자심, 自心)을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흐름은 원효의 일심사상에서 시작하여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 구산, 고려 시대의 오교 양종, 조선 시대의 선교 양종을 거쳐 현대 조계종과 성철돈오돈수 사상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셋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불교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전통이 강하게 나타난다. 신라 자장의 불국토 사상과 전륜성왕 이념의 강조, 황룡사·불국사·석굴암과 같은 국가적 사찰의 건립, 고려 시대 외침에 맞서 팔만대장경을 조성한 일,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활약 등은 이러한 호국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 1. 통불교적 성격

삼국 시대에 전래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불교는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는데, 그 특징 중 하나는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이다.[41]

한국 불교는 인도나 중국에서 분화되었던 다양한 불교 사상들을 융합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이는 원효의 화쟁사상, 의천의 교관겸수, 지눌정혜쌍수 사상 등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불교는 교종에 속하더라도 선정 수행을 중시하고, 선종에 속하더라도 교가(敎家, 교종의 가르침) 공부를 경시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고려 시대 초기에는 새롭게 등장한 선(禪) 종파들이 기존의 교(敎) 종파들에게 급진적이고 위험한 세력으로 여겨져 상당한 반대와 억압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禪)과 교(敎)의 갈등은 고려 시대 대부분 동안 지속되었으나, 점차 깨달음의 진정한 전승을 소유한다는 선(禪)의 주장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후기 선(禪) 종파들은 선(禪)의 명상법이 명백히 우월하다고 주장하기보다, 선(禪)과 교(敎)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서로 유사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화엄종은 고려 시대까지 학문의 활발한 원천으로 남아 있었는데, 특히 균여(均如; 923–973)의 저술은 화엄과 선의 화해를 준비하는 데 기여했으며, 화엄종이 선종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의천 역시 선(禪)과 교(敎)의 통일을 주장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화엄종을 공부한 후 중국에서 천태종을 들여와 적극적으로 전파했으며, 천태종은 또 다른 선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한국 불교는 "5교 2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의천은 선(禪)과 교(敎)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고려 시대 선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눌(知訥; 1158–1210)이다. 당시 불교계는 세속적인 문제에 얽히고 교리적으로도 혼란을 겪고 있었다. 지눌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속 깊숙이 규율 있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수행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시작했고, 송광사조계산에 창건하여 이를 실현했다.

지눌은 선 수행과 실천 방법론을 철저히 분석하고 재구성했다. 그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던 "점진적" 수행과 "돈오(頓悟, 단박의 깨달음)"의 관계에 주목하여, 중국의 규봉종밀대혜종고 등의 사상을 참고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함)" 사상을 확립했다. 또한 대혜종고로부터 화두 수행법을 도입했는데, 이는 오늘날 한국 선종의 주요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지눌의 이러한 선(禪)과 교(敎) 갈등에 대한 철학적 해결 노력은 한국 불교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불교학자 가마다 시게오는 한국 불교의 특징에 대해 "사상적으로는 다양한 교학을 융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종합 불교이며, 신앙으로는 불교 이외의 도교풍수 신앙, 무속 신앙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신앙"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41]

2. 2. 자심(自心) 중시

한국 불교는 사상 체계를 요약하고 수행을 통해 자심(自心)을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특징은 원효의 일심사상,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선종 구산, 고려 중기 이후의 오교 양종, 조선 시대의 선교 양종, 그리고 현대 조계종의 출현과 성철돈오돈수 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잘 나타난다.

신라 말기에는 중국에서 선종(禪宗)이 전래되면서 한국 불교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선종은 명상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흐름으로, 한국에서는 '선(禪)'으로 알려졌다. 이는 기존의 학문 중심적인 종파인 '교(敎)'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때로는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선종은 범낭(法朗; fl. 632–646)이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신행(神行; 704–779)과 도의(道義; ?~825) 등이 대중화했다. 많은 한국 승려가 중국에서 선을 배우고 돌아와 각자의 문파를 열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주요 산문(山門)이 형성되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불렸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의 유명한 선승인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법맥을 이었고, 이엄(利嚴; 869–936)이 세운 수미산문만이 조동종(曹洞) 계통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선종은 계속 발전했지만, 화엄종과 같은 교종 학파 역시 의상원효의 유산을 이어 학문적 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균여(均如; 923–973)는 화엄과 선의 조화를 모색했으며, 그의 저술은 한국 화엄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선과 교의 통합을 주장한 또 다른 주요 인물은 왕자 출신 승려인 의천이다. 그는 중국에서 천태종을 들여와 적극적으로 전파했고, 이로써 고려 불교는 '오교 양종'(五敎兩宗, 다섯 교종과 두 선종)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의천은 선종과의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해인사의 ''고려대장경''


고려 시대 선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눌이다. 그는 당시 세속적인 문제에 얽매이고 교리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했다. 지눌은 정혜결사(定慧結社)라는 새로운 수행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여 송광사를 중심으로 규율 있고 청정한 수행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선 수행과 깨달음의 방법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번에 깨닫고 점차 수행한다)'라는 사상을 정립했다. 이는 중국의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과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등의 사상을 참고한 것으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저술을 통해 제시되었다. 또한 지눌은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수행법을 도입했는데, 이는 오늘날 한국 선종의 주요 수행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지눌의 사상은 선과 교의 갈등을 해소하고 이후 한국 불교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 시대를 거치며 한국 불교는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체계로 이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한국 불교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중심이 되어 지눌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선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불교 태고종 역시 선 수행과 더불어 영산재와 같은 불교 의례 및 예술을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다. 현대의 선 수행은 지눌이 제시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관화(觀話) 참선과 경전 연구를 병행한다. 많은 승려가 여러 사찰을 오가며 수행과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한국 불교는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대의 대표적인 선승인 성철혜능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번에 깨닫고 단번에 수행을 마친다)' 사상을 다시 강조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조계종 내부에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성철의 가르침은 현대 한국 불교의 흐름에 점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마다 시게오는 한국 불교의 특징을 "사상적으로는 다양한 교학을 융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종합 불교이며, 신앙으로는 불교 이외의 도교풍수 신앙, 무속 신앙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신앙"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41]

2. 3. 호국불교 사상

한국 불교는 오랜 시간을 거치며 한국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불교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호국불교(護國佛敎)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한국 불교 역사 전반에 걸쳐 꾸준히 나타났다.

호국불교의 면모는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시대 자장은 신라가 부처가 사는 정토, 즉 불국토라는 사상을 펼쳐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고 불교 중심의 국가 운영을 지향했다. 또한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전륜성왕 이념을 내세워 왕권의 신성함과 정당성을 불교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다. 국가적 염원을 담아 황룡사, 불국사, 석굴암과 같은 대규모 사찰을 건립한 것 역시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호국불교 정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외세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부처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는 백성들의 염원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탄압받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많은 승려들이 승병으로 나서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이는 억압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자 했던 불교계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호국불교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증명한다.

3. 한국 불교의 역사

한국불교는 약 1,700년 전 삼국시대에 중국 등 외부로부터 전래되어 한국 민족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중요한 사상 중 하나이다. 기록상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처음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시대 각국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주요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와 더불어 국가의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으며 크게 융성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일부 세력이 세속화되고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회적 비판에 직면했고, 이는 조선 건국 이후 숭유억불 정책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적인 탄압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했으며, 세조 때 잠시 부흥하기도 했다.

남북국 시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은 고려 시대 이후 한국 불교의 중심 흐름을 형성했다. 교리 연구 중심의 교종과 실천 수행 중심의 선종을 아우르는 통불교적 성격이 강해졌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선종이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해방 이후 비구-대처분쟁을 거치며 독신 승려 중심의 대한불교조계종이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으로 자리 잡았다.

3. 1. 삼국시대의 초기 불교

한국불교는 약 1,700년 전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전래되어 한국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상이다. 기록상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과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평양 근교 4세기 중반 고분에서 불교 문양이 발견되는 등[7] 실제로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율령 반포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 집권적 통치 질서를 확립하려던 시기와 맞물린다. 각국은 불교를 왕권 강화와 백성 통합을 위한 통치 이념으로 적극 수용했으며, 불교는 도입 초기부터 삼국의 주요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고구려'''

고구려에는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경전을 전한 것이 공식적인 시작이다.[14] 순도는 반야 사상과 함께, 기존 중국 사상으로 불교 교리를 이해하려던 격의불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를 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샤머니즘인과응보 사상이나 복을 구하는 믿음은 초기 불교 가르침과 유사하여, 왕실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비교적 쉽게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은 신라로 건너가 551년 신라 최초의 국통(國統)이 되어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처음 주관하기도 했다.

'''백제'''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東晉)에서 온 인도 출신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8][9] 백제 왕실은 불교를 적극 수용했으며, 아신왕은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포하며 신앙을 장려했다. 526년에는 승려 겸익이 직접 인도로 가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율장(律藏)을 연구한 뒤 많은 계율 경전을 가지고 돌아왔다. 겸익은 이를 번역하고 백제에 계율종을 창시했는데, 이는 중국 계율종보다 약 1세기 앞선 것이었다. 이로 인해 겸익은 한국 불교 연구의 시조로 여겨진다.[14] 백제에서는 법화경 신앙과 미륵 신앙도 성행했다.

'''신라'''

신라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었다. 5세기경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 등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으나[8][9],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지 못했다. 불교 수용을 둘러싼 갈등은 527년(법흥왕 14년) 이차돈순교 사건을 계기로 해결되었다. 귀족 관리였던 이차돈은 불교 공인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무릅썼고, 그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했으며, 다음 왕인 진흥왕 대에 이르러 불교는 크게 성장하여 신라의 국교로 자리 잡았다. 진흥왕은 불교 원리를 바탕으로 청소년 조직인 화랑도를 육성하고, 스스로 승려가 되기도 했다. 승려 자장 등은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 불교는 국가를 수호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사리장엄 유물은 당시 불교 미술과 신앙의 수준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삼론종(중관학 사상 중심), 계율종(계율 연구 및 실천 중심), 열반종(대반열반경 중심) 등이 먼저 전래되었고, 이후 화엄종(화엄경의 상호의존 사상 중심), 원융종, 법성종 등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었다. 특히 화엄종은 교육받은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며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불교는 각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파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6세기 중반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전해졌으며, 이는 금동 불상이나 한역 불경 등 중국화된 불교의 특징을 보여준다.

3. 2.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통일신라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여 불교 사상과 문화가 크게 융성한 시기였다. 이 시대에는 원효의상과 같은 뛰어난 승려들이 활동하며 한국 불교 사상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원효는 모든 사상과 종파가 결국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는 화쟁사상을 펼쳤고, 의상화엄종을 개창하여 신라 불교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상적 발전을 바탕으로 불국사석굴암 같은 세계적인 불교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만들어져 당시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새롭게 전래되어 기존의 교종 중심 불교와 더불어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이후 구산선문으로 대표되는 선종 사찰들이 전국 각지에 세워지면서 한국 불교의 중요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3. 3.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불교를 국가의 중요한 통치 이념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했으며,[44] 이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통합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띠었다.[15][16] 왕실과 귀족들의 참여 속에 연등회팔관회와 같은 대규모 불교 의식이 성대하게 열렸다.[45] 불교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교와 함께 고려 사회를 이끄는 핵심 사상이었다.

신라 말기에 전래된 선종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기존의 경전 연구 중심의 교종 세력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초기 선종은 기존 교종 세력으로부터 급진적으로 여겨져 견제를 받았으나,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로 의천이 있다. 그는 송나라에서 천태종의 가르침을 배우고 돌아와, 화엄종과 천태종의 교학을 바탕으로 선종을 포섭하려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며 선교융섭(禪敎融攝) 운동을 펼쳤다. 의천이 소개한 천태종은 왕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교세를 넓혔다. 이로써 고려 불교는 기존의 5교(五敎)에 선종 계열인 조계종과 천태종이 더해져 '5교 양종(五敎兩宗)'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의천보다 약 반세기 뒤에 활동한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고자 했다. 그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하며 이론(교학)과 실천(선)의 조화를 추구했고, 이는 조계종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지눌의 가르침은 선 수행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는 통불교적 성격을 띠었으며, 일반 민중에게도 폭넓게 받아들여져 한국 불교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지눌 이후 선종은 점차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어문이 그린 수월관음도, 1310년, 비단에 먹으로 그림


고려 시대 불교 문화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팔만대장경의 제작이다. 몽골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두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목판에 새겼다. 첫 번째 대장경(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1236년부터 1251년까지 다시 제작된 두 번째 대장경(재조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고려의 뛰어난 인쇄술과 불교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불교는 점차 본래의 가르침을 잃고 세속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사찰과 승려들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부패하면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세속화와 타락은 고려 왕조의 쇠퇴와 맞물려,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숭유억불 정책을 펴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경한 백운(景閑白雲; 1298–1374),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과 같은 뛰어난 선사들이 등장하여 원나라에서 임제종의 화두 수행법을 도입하고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선 수행뿐만 아니라 경전 연구와 유교, 도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 이후 한국 불교가 삼교회통(三敎會通)의 경향을 보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3. 4.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과 유지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억불숭유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려 말 불교계의 폐단을 비판하며 등장한 신진사대부 세력과 이성계는 불교를 국가 운영의 중심에서 배제하고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같은 승려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국가 정책의 큰 방향은 불교 억압으로 나아갔다.

조선 초기, 불교 종파는 기존의 '5교 9산' 체제에서 점차 축소되었다. 태종 7년(1407년)에는 전국의 사찰을 88개로 대폭 축소하고, 11개 종파를 7개 종파(조계종, 천태종, 총남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로 통합했다.[46] 뒤이어 세종 6년(1424년)에는 다시 7개 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양종으로 통합하고, 사찰 수도 선종 18개, 교종 18개, 총 36개 사찰만 남기고 모두 폐사시켰다.[47]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찰이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폐사되었다. 또한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고 사회적 신분도 천민 수준으로 격하되었고, 불교식 장례나 탁발(걸식) 행위도 금지되는 등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태종 7년(1407) 존속 사찰 (7종 88사)'''
종파사찰 수주요 사찰 (일부)
조계종24통도사, 법주사, 가지산 보림사, 영축산 석남사, 도갑사, 장곡사
천태종17백암사, 청계사, 무위사, 선운사
화엄종11금장사, 법천사지, 향림사
자은종17관음사, 신혈사, 보광사, 창성사 등
중신종8진구사, 보경사, 미륵사지 등
총남종8삼화사, 만연사, 보광사 등
시흥종3오봉사, 하거사, 적조사 등



'''세종 6년(1424) 존속 사찰 (선·교 양종 36사)'''
종파본산사찰 수주요 사찰 (일부)
선종흥천사18숭효사, 회암사지, 진관사, 화엄사, 유점사, 석왕사
교종흥덕사18광명사, 영통사, 속리산 법주사, 해인사, 월정사, 영명사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불교는 명맥을 이어갔다. 조선 초기의 승려 기화(己和, 1376–1433)는 유교도교에도 능통했으며, 불교·유교·도교 삼교의 본질적 통일성을 주장하는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불교를 옹호했다. 그는 체용(體用)과 화엄 사상 등을 활용하여 불교 교리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또한 세조는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간행하는 등 일시적인 불교 진흥 시도를 하기도 했다.

김명국의 ''달마도'', 17세기


그러나 성종 대에 이르러 도첩 제도가 폐지되고 승려의 출가가 금지되었으며[48], 연산군 때는 선종과 교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와 흥덕사마저 폐사되어 관청이나 유흥 장소로 바뀌었다. 중종 대에는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가 폐지되고 불상을 파괴하는 등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중종 사후 문정왕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는 일시적으로 부흥기를 맞았다. 문정왕후는 1551년 폐지되었던 선종과 교종 양종을 복구하고 승과(僧科)를 부활시켰다. 이때 보우(普雨, 1515–1565)를 선종판사로, 수진을 교종판사로 삼아 불교 중흥을 이끌었으며,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과 같은 우수한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보우는 척신으로 몰려 유배지에서 사망하는 등 불교 부흥은 지속되지 못했다.

한국 사찰의 수호신상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1598)은 불교계의 사회적 위상을 일부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서산대사는 조정의 요청을 받아 전국 승려들에게 격문을 보내 승병을 조직했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 영규(靈圭) 등을 비롯한 수많은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승병들의 활약은 국가적으로 인정받아 전쟁 이후 불교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다소 완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에서의 공적 외에도, 원효, 지눌, 기화 등의 사상을 계승하여 불교 교리와 수행의 통일을 강조하며 조선 후기 불교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유정, 언기(彦機, 1581–1644), 태능(太能, 1562–1649), 일선(一禪, 1533–1608) 등 네 제자에게 이어져 현대 한국 불교 선종의 주요 법맥을 형성했다. 조선 후기 승려들은 주로 산사에서 관화선(看話禪) 수행에 집중했으며, 하나의 화두, 특히 조주 종심의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에는 화엄 사상 연구가 다시 활발해지고 정토 신앙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불교는 여전히 국가의 통제 하에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3. 5. 근현대 한국 불교

1870년대 일본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승려와 비구니의 독신 생활을 폐지했다. 일본 불교도들은 도시 내 포교 권리를 얻게 되었고, 이는 승려의 도심 진입을 500년간 금지했던 조선 시대의 조치를 해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토진종과 니치렌 불교 종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했으며, 원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파가 형성되기도 했다.[17]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한국 불교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찰령(寺刹令)은 사찰 운영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전통적인 승가 공동 운영 방식 대신, 총독이 임명한 주지가 사찰 재산의 사유권을 갖고 상속할 수 있게 되었다.[18] 또한, 일부 친일 성향의 승려들이 결혼하여 자녀를 두는(대처승) 등 일본 불교의 관습을 따르기 시작했다.[18] 1920년 개정된 사찰령은 사찰 행정 체계를 재편하여 일본 정부가 전국의 주요 31개 사찰을 직접 감독하게 했고, 그 본부를 각황사(현재 조계사)에 두었다.[19] 중일 전쟁 시기에는 한국 불교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으며,[19] 일본 당국은 많은 사찰의 미술품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이 문화재들의 반환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형적인 불교 사찰 내부


1945년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확산된 대처승(결혼한 승려)과 전통적인 비구승(독신 승려)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는 비구-대처분쟁으로 이어졌고, 사찰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되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친일 불교' 청산을 명분으로 불교계에 개입했는데,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은 사찰에서 퇴거하라"는 담화는 비구-대처 갈등을 더욱 격화시켜 물리적 충돌까지 야기했다.[49] 이러한 혼란 속에 불교계는 분열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이는 기독교 성장의 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결국 이 분쟁을 거치며 독신 승려 중심의 대한불교조계종이 한국 불교의 최대 종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20]

1960년대 이후 불교는 재가 신자 중심의 독립적인 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성장세를 보였다.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포교 활동이 개신교의 방식을 참고하여 현대적으로 이루어졌다.[24] 또한, 정부 차원에서 역사적인 사찰의 복원과 재건에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면서 불교 부흥에 기여했다.[17]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기간(1961–1979) 동안 범불교 단체 결성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독신 승려 중심의 조계종과 관계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0년, 한국 불교는 완전한 독신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과 독신 및 결혼한 승려를 모두 포함하는 태고종으로 공식 분리되었다.[50][51] 이때 조계종은 가사 색을 갈색으로 변경하여 태고종(전통적인 붉은색 가사 유지)과 시각적으로 구분했다. 두 종단 모두 법장부 계율을 따르지만, 태고종 승려들은 독신 서원을 되돌릴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다. 조계종이 창종될 당시 정부는 소수의 독신 선 수행자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많은 의례 전문가들은 태고종에 남게 되었다. 조계종은 스스로를 전통 한국 불교의 주요 계승자로 여기며, 태고종은 두 번째로 큰 종단으로 한국 불교의 전통 의례를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현대 한국의 수행은 대한불교 조계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러 주요 산사에서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법을 실천하고 있다. 이는 고려 시대 지눌이 제시한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번에 깨닫고 점차 수행함)의 가르침에 기반하며, 엄선된 불교 경전 연구를 병행하는 방식이다. 한국 승려들은 특정 사찰에 소속되면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여러 사찰을 오가며 수행과 공부를 이어간다. 근래에는 서구 출신 수행자들의 유입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한편, 현대 한국 선승 성철혜능돈오돈수(頓悟頓修, 단번에 깨닫고 단번에 수행을 마침) 사상을 강조하면서 한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조계종 내부에서도 점진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연등회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 불교계는 다시 한번 시련을 겪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불교 활동을 제한하려는 정책을 펼쳤고,[19] 많은 역사적 사찰들이 관광지로 지정되어 정부 관리 하에 놓이면서 자율성을 침해당했다.[19] 특히 1980년 10월 27일부터 닷새간 벌어진 10·27 법난(경신대탄압)은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불교 정화와 반정부 인사 수사 명목으로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사찰을 급습하여 55명의 승려를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 과정에서 낙산사 주지가 사망하는 비극도 발생했다.[19][25] 비록 기소된 승려는 없었으나 많은 이들이 강제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1980년대 내내 불교계는 정부 요원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 지원 또는 음모 혐의로 허위 기소되었다.[19] 이러한 탄압은 국가의 보호를 받던 전통적인 '호국불교'(護國佛敎) 개념에 대한 반성을 촉발했고, 사회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불교'(民衆佛敎)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25] 이는 또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맥을 같이하며, 불교계가 사회적 약자를 돕고 사회 개혁에 목소리를 내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교는 미디어와 교육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왔다. 불교방송(BBS)과 BTN 불교TV 같은 미디어 네트워크가 설립되었고,[24] 불교 종단들은 대학, 학교, 신학대학 등을 운영하며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24] 관음선원과 같은 단체는 국제적인 선(禪) 포교 활동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26]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도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 세력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52] 불교 문화재 훼손 사건(불상 파괴, 사찰 방화 등)이 발생했으며,[18]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공격적인 선교 활동이 불교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27] 또한,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공직 사회 내 기독교인 편중 현상이 두드러져 종교 편향 논란이 일기도 했다.[28][29][30]

최근에는 일부 개신교 교회의 공격적인 선교 방식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신자 수가 늘어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불교의 영적, 문화적 역할이 다시금 주목받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31][32]

4. 한국의 불교 종단

200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는 총 106개 이상의 불교 종단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에서는 불교의 종파를 종단(宗團)이라고 부르며, 종단 이름 뒤에 '종(宗)' 자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불교 종단들의 연합체인 대한불교종단협의회가 있으며, 이 협의회에 소속된 종단들이 일반적으로 전통 불교로 인식된다. 대표적인 주요 종단으로는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천태종, 진각종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군소 종단들이 각자의 교리와 수행 방식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는 원불교와 같이 불교에 뿌리를 둔 신종교가 존재하며, 일본 불교계 신종교인 릿쇼코세이카이, 신뇨엔, 국제창가학회, 영우회 등의 한국 내 거점도 활동하고 있다.

4. 1. 대한민국 전통 사찰 현황

문화체육관광부의 2022년 12월 자료[56]에 따르면, 대한민국에는 980개의 전통 사찰이 있다. 다만, 이 집계에는 대다수의 법당이 도심에 있는 진각종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천태종의 경우에도 구인사만 포함되어 있다.

5. 현대 한국 불교의 과제와 전망

(내용 없음)

5. 1. 기독교와의 관계

1950년대부터 이승만 정부 등은 한국 불교계를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이승만은 1954년 소위 "친일 불교"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는데,[49]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생긴 결혼한 승려(대처승)와 독신 승려(비구승) 사이의 갈등과 맞물렸다. 비록 일본의 한반도 병합 이전에도 일부 한국 승려들이 독신제 폐지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갈등은 사찰 통제권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로까지 번졌다. 독신 승려 중심의 조계종은 결혼한 승려들에 반대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이러한 내부 갈등과 정부의 억압 속에서 불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신자를 잃기 시작했다. 억압받던 불교와 달리 민족주의를 수용한 기독교는 신자가 급증했으며,[49] 일부 기독교 과격파에 의한 불교 탄압(폐불) 운동도 발생했다.[52]

1980년대에는 장로교 신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반불교 정책을 채택하고 불교 활동을 제한하려 했다.[19]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역사적인 사찰들이 정부 운영 하의 관광 휴양지, 즉 "국립공원"으로 전환되면서 사찰의 자율성이 침해되었다.[19] 이에 불교계, 특히 조계종은 강하게 반발했다. 1980년 10월 27일부터 31일까지 경신법난 기간 동안, 정부는 반정부 조사와 불교 "정화"라는 명목으로 서울 조계사 본사를 포함한 전국의 주요 사찰을 급습했다.[19][25] 이 과정에서 55명의 승려가 체포되었고, 낙산사 주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심문과 고문을 당했으며,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5] 조사받은 승려 중 기소된 사람은 없었지만, 많은 이들이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1980년대 내내 불교계는 정부 요원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고, 많은 승려들이 공산주의자 지원 또는 음모 혐의로 허위 기소되었다.[19] 이러한 탄압은 국가가 불교를 보호한다는 기존의 '호국불교'(護國佛敎) 관념을 퇴색시켰고, 승려와 재가 신자들을 중심으로 민중불교(民衆佛敎, "대중을 위한 불교" 또는 "실천 불교")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25] 이 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을 강조하며 한국의 공격적인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17]

1990년대 들어서도 대한민국 정부와 불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근본주의 개신교 종파와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일부 개신교 목사나 신자들은 불교 사찰이나 문화재를 훼손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사찰에 방화를 하거나, 불상이나 불화 등 불교 미술품을 파괴하고(심지어 불상의 목을 자르거나[37] 빨간 십자가를 칠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찰 근처에서 공격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는 사례들이 보고되었다.[27] 1990년 불교방송(BBS) FM 라디오 방송국 개국 직후에는 젊은이들이 방송국의 음향 시설을 파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8] 이러한 종파 간 긴장은 정부 관리들(상당수가 기독교인)이 정치적으로 기독교인에게 유리하게 편향된 결정을 내린다는 불교계의 불만을 야기하기도 했다.[28]

특히 개신교 신자인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불교계는 정부가 종교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비판했다.[34][35] 대통령 내각 구성에서 기독교인이 12명인데 비해 불교도는 1명에 불과하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고,[29] 정부의 일부 공문에서 불교 사찰을 누락하는 등 불교를 차별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34][35] 2006년에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부산의 한 기독교 집회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주여, 이 나라의 불교 사찰을 무너뜨려 주소서!"라는 기도가 나왔다는 보도[36]가 있었으며, 이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불교-기독교 연구'' 저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의 상당수 불교 사찰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거나 훼손되었고, 불상이 우상으로 지목되어 목이 잘리는 등의 공격을 받았다.[37] 2008년에는 경찰이 서울 조계사에 은신한 시위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지관 스님의 차량을 수색하여 불교계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34] 2010년 10월에는 한 신학교 학생들이 서울 봉은사가 파괴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하여 공분을 샀고, 이후 해당 목사와 학생들이 봉은사를 방문하여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38]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종교 간 협력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높아짐에 따라, 기독교 개신교인들의 불교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39] 박근혜 정부 첫해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국가 메시지가 전달되었는데, 이는 불교계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이전 이명박 정부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평가받았다.[40]

최근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일부 개신교 교회의 공격적인 선교 방식과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 불교로 개종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으며,[31] 이는 최근 몇 년간 한국 불교의 영적, 문화적 부흥에 기여하는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32]

5. 2. 사회적 역할 확대

1960년대부터 한국 불교는 독립적인 재가 신자 단체의 형성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 이들 단체는 주류 종단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특히 개신교의 방식을 참고하여 청소년을 대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친교와 영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힘썼다.[24] 이러한 활동은 한국 불교의 현대화에 기여했다.[24]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역사적인 불교 사찰의 복원과 재건에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며 불교 부흥을 도왔다.[17]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반불교 정책과 탄압은 불교계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19], 역설적으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0년 10.27 법난 기간 동안의 탄압[19][25] 이후, 국가 주도의 호국불교(護國佛敎) 개념에 대한 반성과 비판 속에서 '민중불교(民衆佛敎)' 운동이 일어났다.[25] 민중불교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현실 문제에 주목하며,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요구와 맞물려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공격적인 개신교 선교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17][25]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교계는 미디어와 교육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넓히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BTN 불교 텔레비전 네트워크와 불교방송(BBS)이라는 두 개의 주요 불교 미디어 네트워크가 설립되어 케이블 TV, 라디오 등을 통해 불교 문화를 전파했다.[24] 또한 불교 종단들은 대학 3곳, 학교 26곳, 신학대학 16곳을 운영하며 교육 분야에서도 역할을 강화했다.[24] 국제적으로는 관음선원과 같은 성공적인 선(禪) 수행 단체가 등장하여 한국 불교를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26] 이러한 노력들은 불교가 전통적인 종교의 틀을 넘어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역할을 확대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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